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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삼국유사

## 작가의 말 오늘날 세계가 투기디데스 함정(강대국 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통한 경험이 스승이 되어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서머셋 모옴은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인생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그친 삼국사기보다, 삼국유사는 최초로 단군신화를 잉태시켜 반만년 역사가 이 책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늘의 명을 받은 고귀한 민족임을 만방에 알렸습니다. 또한 당시 몽고의 간섭으로 부원배(附元輩: 원나라에 붙은 무리)들이 날뛰던 세상이었기에, 민족의 분열을 막고 정체성을 찾아 단결시키기 위해 기록된 사서(史書: 역사책)입니다. 이 책은 수많..
## 작가의 말

오늘날 세계가 투기디데스 함정(강대국 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통한 경험이 스승이 되어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서머셋 모옴은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인생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그친 삼국사기보다, 삼국유사는 최초로 단군신화를 잉태시켜 반만년 역사가 이 책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늘의 명을 받은 고귀한 민족임을 만방에 알렸습니다. 또한 당시 몽고의 간섭으로 부원배(附元輩: 원나라에 붙은 무리)들이 날뛰던 세상이었기에, 민족의 분열을 막고 정체성을 찾아 단결시키기 위해 기록된 사서(史書: 역사책)입니다. 이 책은 수많은 배달민족의 역사와 전설, 소중한 향가(鄕歌: 우리말 노래)를 기록하여 민족의 혼을 담았으며, 한국 근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 민족의 보물단지 같은 사서입니다.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삼국사기에 흔히 적혀 있는 중국에 조공(朝貢: 공물 바침)을 바친 기록이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事大主義: 큰 나라를 섬기는 주의)적으로 쓰인 반면, 삼국유사는 주체성 있게 기록된 사서라는 뜻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1975년까지 살다가며 21세기는 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한류(Korean wave)를 통해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역사를 심도 있게 공부하면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며, 토인비 같은 세계적인 학자가 이런 예언을 한 이유입니다. 나아가 인도의 점성가 아난드는 21세기 중반에 한국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세계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두 예언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광개토대왕처럼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며 호령하는 날이 다시 올지 믿어보고, 가슴에 로망을 품고 살아봅시다. 그런 조짐은 연해주 주민들이 달나라만큼 멀고 호전적인 모스크바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지척(咫尺: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을 더 동경한다는 점에서 엿보입니다.

삼국유사는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제1 앞에는 왕력(王歷: 왕의 연대기)이 있지만 풀이할 내용이 없어 생략했습니다. 이어서 기이(紀異: 기이한 일), 흥법(興法: 불법을 일으킴), 탑상(塔像: 탑과 불상), 의해(義解: 의로운 해석), 신주(神呪: 신비한 주문), 감통(感通: 감응하여 통함), 피은(避隱: 세상을 피하여 숨음), 효선(孝善: 효도와 선행)의 아홉 편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연기장(年紀帳: 연대기) 형식으로 쉽고 단순한 용어를 사용했지만, 삼국유사는 난해(難解: 이해하기 어려움)한 불교 용어 등 특수용어가 많아 뜻풀이가 어려웠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김견명(金見明; 자는 일연) 스님은 역사 실력보다 승과 장원급제한 심오(深奧: 깊고 오묘함)한 경지(境智: 깨달음의 경지)의 한학 실력을 가진 분으로 인정받습니다. 사서는 연대가 생명인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리 연대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풀어쓴 삼국유사에서는 오기된 연호를 교정하여 기록했습니다.

왕력은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로, 풀어쓸 필요가 없어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기이 편은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했으며, 1·2권에 걸쳐 이어집니다. 기이 편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한 연유를 밝힌 서(敍: 서문)가 붙어 있습니다. 흥법 편은 삼국의 불교 수용과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 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 편은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 원광 스님의 서학에 대한 조항)를 비롯한 신라 고승들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14항목, 신주 편은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 신비한 능력을 가진 승려)에 대한 3항목, 감통 편은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 영험한 감응)에 관한 10항목, 피은 편은 초탈고일(超脫高逸: 세상을 초월한 고고한 인물)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 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 선행에 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했습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라 풀이하지 않으면 읽기가 매우 어려워 풀어 쓴 것입니다. 또한 스님이 지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피력(披瀝: 마음을 털어놓음)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속명: 김견명(金見明 또는 全見明)) 스님은 1206년(고려 21대 희종 2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보각국존이라는 나라의 스승 칭호를 받은 분입니다. 그는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1206년)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년)까지 살며,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 등 모진 세월을 겪었습니다. 삼국유사는 경북 군위군 삼국유사면(원래 고로면이었으나 2020년 변경) 화북리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에서 탄생했으며, 이 절은 선덕여왕 2년(64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습니다. 삼국유사는 1285년(충렬왕 11년) 불승(佛僧) 일연(一然)이 지은 5권 3책의 역사책입니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일연 스님에게 절을 올리며 최고의 스님으로 모셨고, 특히 원 간섭기에 덕행 높은 고승에게 국가가 주는 최고 법계(法階: 승려의 계급)이며 나라의 스승인 국존(國尊: 국사를 고친 이름)을 삼았습니다.

일연 선사가 몽고 지배기에 단군 신화가 포함된 삼국유사를 지은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역사만이 희망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외치며 민족의 존립(存立: 존재와 유지)을 역사 연구에서 찾으려 한 뜻과 맥락이 통한다고 봅니다. 신채호 선생이 을지문덕과 이순신의 전투를 나라를 잃은 시기에 기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들 장군이 그 시대에도 있었다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또한 신채호 선생이 반역자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과 금국정벌론을 ‘우리 민족 1천 년래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한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묘청을 주관이 뚜렷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한 인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270년 배중손의 삼별초군이 항몽 운동을 계속한 것은 기술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기의 정복군주 원세조의 딸이 국모인 상황에서 배중손을 언급할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덤으로 기술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오늘날 아프리카보다 못한 배고픈 지대에서 벗어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로 선진국이 된 데에는 두 독재자의 업적이 크다는 점입니다. 이승만은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사짓는 자가 땅을 가짐)의 법칙으로 지주와 소작농을 없애고 토지개혁에 성공해 농민 대다수가 토지를 소유하게 했습니다. 이에 소작(小作)민이 자작(自作)민으로 탈바꿈하며 월남처럼 토지개혁 실패로 농지를 잃고 베트콩에 의해 공산화된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대가로 신념을 갖고 경제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국민들이 그의 장기 집권을 비판할 때마다 “나의 업적은 후세 역사가들이 평가할 것”이라 했고, “이웃 일본은 잘 사는데 우리는 왜 못 사느냐”며 신년사에서 단골로 언급했습니다.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 장교 출신으로 일본을 잘 알았기에 한국을 일본처럼 잘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신념과 의지가 오늘날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지만, 고조선, 기자, 위만조선, 가락 등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님이 지어서 불교 관련 문화가 매우 많아 불교사로 오해받을 정도입니다. 특히 고조선 신화 서술은 우리로 하여금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게 하고, 단군을 국조(國祖: 나라의 시조)로 받드는 배달민족의 긍지를 갖게 하여 개인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뭉치게 했습니다.

만약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삼국 시대 이전 역사는 중국의 들러리로 엉터리 기록된 중국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의존했을 것입니다. 신라, 고구려, 백제 역사 외에도 단군(檀君)의 사적(史蹟: 역사적 사실), 신화, 전설, 설화, 향가(鄕歌: 우리말 노래), 고려 충렬왕 때까지의 유사(遺史: 남은 역사)가 풍부히 수록된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1년 일본 배를 타고 가다 배 안에서 본 일본 지도에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고, 일본 박물관에서는 한국 역사가 고조선과 삼한을 배제하고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어 삼국유사에 담긴 삼국 이전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듯해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처럼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빼지 않은 점은 다행이었습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그 이전 역사를 다루지 않아 정사(正史: 공식 역사책)라지만 사대주의 관점에서 쓰였고, 그렇지 않은 삼국유사보다 덜 부각됩니다.

삼국유사는 1285년에 지어졌으며, 이는 삼국사기(1145년)보다 140년 뒤입니다. 김부식이 빠뜨린 기록을 불승 일연이 수십 년간 모아 기록했기에, 삼국유사의 이름처럼 삼국사기가 흘린 기억들을 담아 중복을 피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큰 정치인이 아닌 종교인, 그것도 80세 노인이 혼자 자주적으로 썼다는 점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2020년 경북(현 대구시) 군위군 고로면이 삼국유사면으로 이름이 바뀔 정도로 군위군 사람들의 자존심입니다. 차라리 군위군 전체를 삼국유사군으로 바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국보급 사서임이 틀림없습니다. 삼국사기는 1년 365일을 일기처럼 중국에 숙위(宿衛: 황제를 경호함)나 조공(朝貢: 공물 바침)을 빠짐없이 적어 사대주의(事大主義: 큰 나라를 섬기는 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미국 사학자들은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속국이 아니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합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살던 시절 몽고 침입으로 국토가 불바다였던 때, 몽고의 불의를 목격하며 뼈에 사무치는 적개심과 증오심을 느끼던 세상에서 비분강개(悲憤慷慨: 슬프고 분하여 감개를 토함)한 상태로 민족의 자존심을 담은 이야기식 사서입니다. 단군 조선부터 삼국시대 역사가 수록된 소중한 역사서로, 동명왕 건국신화, 삼국시대 승려 30명의 전기, 신라 향가 14수가 담긴 보물 같은 사서입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에 입각한 연기장(年紀帳: 연대기)식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야사지만 우리 역사를 주관적으로 세세히 파고든 주체성 있는 역사서입니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변화가 심합니다.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깨며 승승장구하던 나라였으나, 김유신이 도사 난승에게 배운 특유의 전술—장병 중 한 명을 희생시켜 병사들이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하고, 뼈에 사무치는 적개심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각자가 비분강개(悲憤慷慨: 슬프고 분하여 감개를 토함)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폭발적 희생정신을 이끌어내 승전하는 전술—로 인해 시퍼런 삼척검으로 사랑마저 끊은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로 인해 배달민족의 구렁이 알 같은 700년 사직(社稷: 나라)이 와르르 무너졌으니, 동국(東國: 우리나라)판 걸주(桀紂: 폭군) 의자왕이 충신을 버리고 간신과 너스레를 떨며 망국의 꽃 3천 궁녀와 운우지정(雲雨之情: 남녀의 정교)을 나누고 나라 다스리기를 게을리한 탓에 하늘이 꾸짖은 대가였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왜 직간(直諫: 바른 말로 간함)하는 충신을 버리고 감언이설(甘言利說: 달콤한 말과 이로운 말)하는 간신과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인)이 끼어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유신의 전술이 그렇다면, 한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달랐습니다. 일본 규슈 장인이 포르투갈 장인과 총 만드는 기술과 미녀 딸을 바꿔 만든 조총을 들고 불법 침입한 왜병의 유효사거리(50m) 약점을 알고, 접근전을 피하여 50보 사정거리를 벗어나 함포가 없거나 약한 왜선을 향해 사정거리(射程距離: 쏘는 거리)가 500보 이상인 함포(艦砲: 배에 장치한 대포)를 집중 포격해 23전 23승을 거뒀습니다. 반면, 무식이 상식인 원균은 조총의 유효사거리를 모르고 미련하게 접근전을 펴 병사들을 칠천량 앞바다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 과정을 삼국유사를 통해 보면, 태조는 견훤에게 상보(上府: 임금이 신하를 특별히 존중할 경우 주는 칭호)를 주고 신검의 후백제를 토붕(土崩: 흙이 무너짐)시켰습니다. 경순왕을 상보로 삼은 것은 왕건의 고수(高手: 뛰어난 수단)의 술책(術策: 전략)이었습니다. 포용이라는 역동성을 이용해 신라인을 견마지로(犬馬之勞: 개나 말처럼 충성함)와 같은 충직한 고려인으로 둔갑(遁甲: 변신)시키는 데 촉진제 역할을 했으니, 오늘날 정치인들이 네거티브를 버리고 포용을 앞세워야 할 덕목입니다.

일연 선사는 삼국유사를 지을 때 고본(古本: 옛 책)을 참고했는데, 이는 구 삼국사를 포함한 알려지지 않은 다량의 사서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국초의 유기 백 권과 26대 영양왕 11년(600년) 이문진이 지은 신집 5권,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30년(375년) 고흥이 지은 서기, 신라는 연대 미상이지만 24대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 거칠부(황종)가 지은 국사가 있습니다. 이 구렁이 알 같은 사서들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1285년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에는 구 삼국사가 남아 있었던 듯합니다. 이들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최소 200년마다 재판(再版: 다시 간행)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녹아 있어 다행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연대가 맞지 않거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된 곳이 많아 이를 수정해 기록했으며, 삼국사기는 연기장(年紀帳: 연대기)식으로 쉽게 썼지만 삼국유사는 어려운 뜻풀이가 많아 해석이 어려워 알기 쉽게 풀어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원종흥법(原宗興法: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킴)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다는 뜻이고, 염촉멸신(厭髑滅身: 이차돈이 순교함)은 염촉(이차돈의 자)이 처형되었다는 의미로, 뜻풀이가 어렵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소로 밭갈이한 우경(牛耕)이 교과서에서는 22대 지증왕 때 시작했다고 적혔으나, 삼국유사에는 3대 유리이사금(노례왕) 때로 분명히 나옵니다[始製黎耜(보습사)及藏氷庫, 作車乗]. 우경 시작, 석빙고 사용, 수레 제작은 유리이사금의 업적으로 교과서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교과서 저자들이 삼국유사를 자세히 읽지 않아 생긴 실수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라 일연 선사가 연로하신 후에 지어 연대 및 사실이 오기(誤記: 잘못 기록됨)된 곳이 많아 이를 교정했습니다.

‘풀어쓴 삼국유사’에서 천년 신라가 망하며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천년 사직(社稷: 나라)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단장(斷腸: 창자를 끊음)의 애타는 심정으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삼켰다가 뱉으며 서라벌을 애석하게 떠나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 “마의태자는 친부 경순왕에게 간하며,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하늘의 운명에 달렸으니, 충신 의사들과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를 굳건히 하다가 힘이 다해 망할지언정, 어찌 천년 역사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넘기겠습니까?’라며 울먹였습니다.(王子曰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宜以一千年社稷一旦輕以與人)” 태자의 말은 맞습니다. 여의길상(如意吉祥: 뜻대로 잘됨)이란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뜻으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와 통합니다. 힘이 없어 말이 먹히지 않는 태자는 세상이 꿈꾸는 자의 것이라는데 꿈을 하늘에 반납하고, 산천과 백성을 눈물로 떠나보냈습니다. 삼베옷을 입고 괴나리봇짐을 메고 천년 사직 서라벌을 뒤돌아보며 억울한 심경을 푸념으로 풀고, 가슴에 맺힌 한을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풀려 했습니다. 짚신 발로 떠나기 힘든 발을 떼니 이별이 어려워 뒷모습이 처량해 보였습니다. 야속(野俗: 천박함)하게 흐르는 흰 구름마저 부끄러워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야생화를 벗 삼아 송골매처럼 떠오르다 가라앉는 노을이 물든 천리 객창(客窓: 나그네의 창)을 찾았습니다. 신라 땅이 고려 땅으로 바뀐 개골산(皆骨山)에 이르니 눈물이 절반, 그리움이 몸을 휩쌌습니다. 깨어진 달빛을 등에 지고 삼베옷 입은 채 풀뿌리로 연명하다 안개 낀 골짜기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니, 천년 세월 장손으로 태어나 막힌 운수를 겪으며 몽환(夢幻: 꿈과 환상)도 펼치지 못하고 탄식(歎息: 한숨)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조각 청산(靑山: 푸른 산)이요, 만고의 고혼(孤魂: 외로운 영혼)이라!”고 읊어봅니다. 망해가지만 천년 사직을 끝까지 붙든 마의태자의 정신은 국난을 당한 우리 민족의 행동과 맞닿아 있습니다. 선조 임금은 명나라로 도망쳐 목숨을 구걸하려 했지만, 민중은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초개(草芥: 풀잎)처럼 던졌습니다. 을사오적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조선을 억압한 조약)을 맺어 나라를 팔았지만, 민중은 의병으로 목숨을 던졌고, 1907년 대구의 서상돈은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갚으면 나라를 되찾을 줄 알고 재산을 털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벌였습니다. 70년 후 위정자들은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외국여행 자유화를 선언하며 IMF에 구걸했고, 국민들은 “망국민이 금가락지를 끼면 무엇하랴”며 나라에 바쳤습니다. 이는 삼베옷 입고 풀뿌리 먹다 영면(永眠: 영원히 잠듦)한 마의태자의 혼이 시킨 일입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교수는 1965년 가나보다 못살던 한국이 개인보다 집단과 국가를 중시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코리안 웨이브가 세계 문화를 이끈다고 칭찬했지만, 일본인과 중국인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서구인은 이를 비판했습니다. 중국인은 그러면 안 됩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식 단상에 수류탄을 던진 이는 누구입니까? 중국 4억 국민은 환호했지만, 장제스는 중국 청년이라 착각했다가 깨졌습니다. 강자에게 약한 중국인은 일본 만행에 저항하지 못했지만, 한국인 윤봉길이 개인보다 국가를 중시해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여 김구 선생에게 피난처와 광복군을 제공받았고, 장제스는 비용을 지원하며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받았습니다.

끝으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리 중국 연호는 사용했지만 조공(朝貢: 공물 바침)을 전혀 기록하지 않은 점이 바람직합니다. 예일대 베스타 교수는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정체성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강자에 대한 약자의 요식행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고구려가 수·당에 조공했더라도, 이는 한족의 중국이 아닌 한반도 북부와 몽골을 아우른 선비족의 정복왕조에 바친 것이니, 당시 한족 중원은 선비족의 식민지였고 우리는 독립국이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주객(主客: 주인과 손님)이 전도(轉倒: 뒤바뀜)되어 수·당을 한족 나라처럼 행세하며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기 땅처럼 주장합니다. 한복, 김치, 칭기즈칸을 중국 것이라 우기는 이들과 어떻게 상대하겠습니까?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음)이란 말처럼 조심해야 합니다. 몽고 침입 시 한족은 색목인(色目人: 서역 사람)보다 천대받는 몽고 식민지였지만, 고려는 끈질긴 항쟁으로 왕씨가 왕위를 잇는 독립국을 유지했고, 기황후는 원나라 국모로 황제 순제를 조종했습니다. 일연 선사가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는 원세조의 딸 충렬왕비 홀도로게리미실이 오만(傲慢: 거만함)했지만, 남편은 왕 태조의 후손 충렬왕이었습니다. 삼국유사는 부원배(附元輩: 원나라에 붙은 무리)로부터 나라의 정체성(正體性: 본질적인 성질)을 잃지 않으려 지은 국보 제306호인 귀한 사서입니다. 몽고 간섭을 약간 받았지만 민족 정체성을 잃으면 끝장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태인은 2천 년간 나라를 잃어도 역사와 정체성을 지켜 국토를 되찾고, 아인슈타인, 에디슨(모친이 유태인) 같은 인재를 배출하며 꿋꿋합니다. 미국 인구 0.2%로 20% 재산을 차지하고 거물급 인사에 유태인이 많지 않습니까!

필자는 삼국유사를 읽고 황룡사 탑이 9층인 이유를 알았습니다. 황룡사 9층탑은 구한(九韓: 신라 주변 아홉 나라)으로부터 신라의 정체성과 독립을 지키고 삼국통일을 이뤄줬습니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황룡사 일을 시작하며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꾼 것도 이를 암시합니다. 탑이 벼락을 맞은 것은 신라 대신 매를 맞고, 몽고 침략 때는 고려를 구하며 불탔으니 애국심이 대단한 탑입니다.

끝으로 진위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관하여 기술해 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삼국사기보다 350년 앞서 지은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짜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무열왕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龍樹;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 김용춘)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도 똑같이 김용춘과 김용수가 동일인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太宗武烈王立諱春秋眞智王子伊龍春一云龍樹之子也)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용춘공의 형 용수 전군은 혹 동태자 또는 금태자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알 수 없다(龍春公兄龍樹殿君或作銅太子子或作金太子子未詳其眞)”라며 용수가 용춘의 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진평왕 44년(서기 62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황룡사에 갔다.
2월,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 왕실 사무를 맡은 기관)의 사신(私臣: 왕의 측근 신하)으로 임명하였다. {四十四年, 春正月, 王親幸<皇龍寺>. 二月, 以伊 <龍樹>爲內省私臣}”라고 되어 있어, 분명히 진평왕 44년(622년) 2월에 이찬(2품) 용수를 내성의 사신으로 임명했다고 나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 적히기를, 건복(建福: 진평왕 연호) 51년(629년) 기축년 가을 8월에 왕이 이찬(2품) 임영리, 파진찬(4품) 용춘·백룡, 소판(3품) 대인과 서현(舒玄: 김유신의 아버지) 등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의 낭비성(청주)을 공략하게 했다고 합니다. {<建福>四十六(五十一)年, 己丑秋八月, 王遣伊 <任永里{任末里}>, 波珍 <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이 기록은 진평왕 44년(622년) 2월에 분명히 이찬(2관등) 용수라고 했고, 그 후 7년 뒤인 진평왕 51년(629년) 8월에는 파진찬(4관등) 용춘이라고 했으니, 용수와 용춘이 다른 사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수와 용춘이 같은 사람이라면 622년에 2관등 이찬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7년 뒤인 629년에 4관등 파진찬이 되겠습니까? 7년 후에 2관등이 강등되었다는 모순(矛盾: 앞뒤가 맞지 않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용수와 용춘이 동일인이라고 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 용수는 형이고 용춘은 동생이라고 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더 정확히 기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서(眞書: 진짜 기록)라는 주장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만 유난히 해자(垓子: 성호, 굴강, 외호)라 하지 않고 독특하게 구지(溝池: 도랑과 연못)라고 적고 있습니다. 구지(溝池)는 도랑(溝)과 연못(池)을 뜻합니다. 1980년대에 월성의 해자를 발굴했을 때, 다른 해자와 달리 성 주위에 여러 개의 연못을 파고 도랑으로 연결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도랑과 연못을 뜻하는 구지와 맞아떨어지니,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서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결론입니다.
주요저서:
연산군일기
폭군이야기 (상)
폭군이야기 (하)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도전과 응전 (흥선대원군 편)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도전과 응전 (명성황후 편)
태종 이방원
조공녀 기황후
백성을 하늘로 본 정도전
청백리 황희와 맹사성
난세를 슬기롭게 극복한 유성용
화랑세기 속의 미실
풀어쓴 삼국사기 (신라 편)
풀어쓴 삼국사기 (고구려, 백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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