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우리 민족에게 고대 역사의 길라잡이 같은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삼국의 역사가 마야나 잉카 문명처럼 암흑에 묻힐지도 몰랐는데, 다행히도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보물 같은 정사가 삼국사기다.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년)에 김부식에 의하여 저술되어 처음 출판되었고, 이후에도 수백 번 계속되는 외세의 침입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여러 번 출간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이다. 13세기의 성암본이나 1394년(조선 태조 3년)의 3차 간행, 1512년(조선 중종 7년)의 4차 간행, 1760년(영조 36년)의 5차 간행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영조 때 간행된 5차 간행본이다. 사실 조선의 임금이나 학자들이 이어서 간행하지 않았다면 삼국사기도 구(舊)삼국사나 고기처럼 영원히 묻힐 뻔했다.
삼국사기 원본은 고사하고 해석본도 읽어보면 모든 용어 즉 연대·지명·관제·관등·인물명·그 밖의 어려운 문제 등이 모두 당시 이름으로 되어 읽어봐야 뜻을 풀이할 수 없어 필자의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니 김부식이 신라 왕실의 후예라 그런지 고려가 고구려(장수왕 이후는 고려)를 계승 한나라인데 신라를 계승 한나라라는 의식이 강하게 풍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고구려인 7명, 백제인은 단 3명뿐인데, 신라인은 변변한 역사적 사실이 없는 사람까지 무려 40명이나 무더기로 끼워 넣었다. 또 김유신 열전 하나만 해도 고구려인 7명을 모두 합친 문장의 길이와 맞먹을 정도로 편파적(偏頗的)으로 기록하여 고구려사와 백제사가 크게 소외되었다. 이렇게 삼국사기의 내용이 형평(衡平)에 왕창 어긋나니 어쩐지 씁쓸하다. 또 수 양제가 고구려가 불손하여 꾸짖으려고 왔다고 기록한 점이나 조공을 바치고 축하 사절단을 보낸 것을 빠짐없이 기록한 점은 사대주의 성격이 농후하며, 구(舊)삼국사나 고기에 실려 있는 단군설화가 삼국유사나 동명왕 편에는 실려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삭제함으로써 고대사가 사라지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백제의 산둥반도 진출의 역사를 빼놓아 대륙에서 우리 역사가 사라지고, 만주가 비록 지금은 중국 땅이 되고 말았지만, 김부식이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아 228년(692년∼928년)이나 먼저 우리의 머릿속에서 구렁이 알 같은 만주라는 소중한 영토가 사라지는 잘못을 범하였는데 그 후 유득공의 힘으로 겨우 되찾았다.
역사는 반복(反復)된다고 한다. 시대와 공간 또는 문명이 달라도 비슷한 상황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기 때문에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여 삶의 지혜를 구할 수 있다. 영토를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지만, 역사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이 책을 풀이하여 기술하였습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비록 지금은 동북삼성이 중국 땅이 되고 말았지만, 고조선의 옛 땅인 요동 땅을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로 오매불망(寤寐不忘) 구토 회복을 기다리던 고구려 다물도 정신(多勿都; 고조선 고토회복)으로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발휘하여 되찾으니, 선비족(몽고과 퉁구스 튀기 민족)이라는 실제 모습을 숨기고, 한족의 가면을 살짝 훔쳐 중원 민족으로 둔갑한 통일된 수·당은 중국 땅이었다고 명분을 내세워 누차(累次)에 걸쳐 찾으려고 하니, 우리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으니, 역사라는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중국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여 이를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한다. 이는 언젠가는 중국이 분열되고 한국이 강해지면,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에 대한 구토 회복하려는 의지를 봉쇄하려는 꼼수 같다. 이는 소련의 분열을 목전에서 보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사전에 봉쇄하자는 뜻 같다.
삼국사기에 선비족이 살짝 한족으로 둔갑한 당 태종 이세민의 말에 의하면, “3월 이세민이 정주(허베이성 딩저우시)에 도착하여 자기를 모시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출병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三月帝至定州謂侍臣曰遼東本中國之地隋氏四出師而不能得)라고 고구려에 쳐들어오면서 요동은 본래 고조선의 땅이라는 것은 살짝 숨기고 본래 중국 땅이라고 침략이 아니고 되찾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명분을 내세워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꼼수를 쓴다. 그러나 우리는 환란 때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 흉노족, 거란족, 여진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돌궐족, 몽고족(내몽고) 등 모든 중국 주변 민족이 영토는 물론 언어조차 잃어버리고, 그들 문화 속에 동화되어, 동아시아 역사 속에 주마등(走馬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약소민족인 우리는 오늘날까지 청솔같이 살아남지 않았는가?
이렇게 역사를 빼앗아가려는 중국 때문에 얼이 빠진 오늘의 간난(艱難)한 현실! 국민이 독도에 쏟는 관심의 반만이라도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회복에 쏟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물려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옛 땅이었던 만주 땅이 지금은 비록 중국 땅이 되고 말았지만, 역사마저 빼앗긴다면 다시 찾을 수 있는 명분마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드넓은 만주 벌판의 말갈 부락을 모두 식민지로 만들었던 고구려의 땅뿐만 아니라 그 기상(氣像)도 우리가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1145년에 지은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진위(眞僞)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젖혀 놓고 현존(現存)하는 한민족(韓民族) 최고(最古)의 사서(史書)이고, 삼국시대에 이미 지어 놓은 우리 국사의 기록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고기(古記)가 모두 녹아있는 고대사의 정본(定本)이다.
필자가 삼국사기를 핵심만 풀어씀에는 무의미한 부분은 제쳐 놓고 핵심내용만 뽑아 삼국시대의 낯선 지명이나 고대 용어는 현대어로 풀이해 놓고, 삼국사기의 한문이 국문으로 직역되어 해석이 어려운 부분은 알기 쉽도록 풀어쓰고, 삼국사기 국문 해석본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엉망인 것을 정정했고. 필자의 생각으로 ‘풀이하는 글’을 끼워 넣어 본문의 설명을 덧붙여 넣었고, 오류 부분을 정정했다. 예를 들어 산상왕은 태조왕의 손자인데 증손이라고 한 점{今王(산상왕)是<大祖(太祖)> 曾孫} 등을 손자라고 교정한 점 등이다. 특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지명이나 성(城) 이름 등을 고려 시대 용어로 바꿔 쓰지 않고 삼국시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현대 지명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일부 학자는 단국대 정영호 교수에 의해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가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수왕은 백제 수도 한산만 점령했을 뿐 바로 한강을 건너갔고 한강 이남으로 깊숙이 내려온 적이 없다. 고구려가 충주까지 진출한 것은 그의 손자인 21대 문자명왕 이후이다. 역사를 해석함에는 사기를 자세히 읽어보고 써야지 추측으로 적어서는 아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한국은 20세기 초 식민지가 되면서도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크게 번영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로마에 망하고 그 후 떠돌아다녔어도 민족의 정신인 언어와 역사를 잊지 않아서 1948년 나라를 되찾아 지구상에 존재한다.
사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부터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일반화해서 불렀는데,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하여 고구려 말까지 모두 고구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고구려가 고려로 되었고 오늘날 세계인이 부르는 Korea가 되었습니다. 사실 고구려 말기 세운 비문이나 중국의 사서를 뒤져보면 모두 고려로 되어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구당서(舊唐書)에 “麟德(당 고종 연호)三年 六月壬寅,高麗莫離支蓋蘇文死를 풀어보면, 서기 666년 6월 임인(壬寅)일에 고려국 대막리지 개소문이 죽었다.”라고 되어있어 당시 중국에서도 분명히 고려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세운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 쫓겨나서 고조선이 되었습니다. 사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후 고려나 왕 씨 고려이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후조선이나 이씨 조선입니다.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강점기가 부르는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이씨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편을 읽다 보면 고구려는 당랑지부(螳螂之斧)하여 중국이 분열되었던 5호 16국 시대에 중국을 쳐서 구토를 회복하더니, 5호 16국이 북위에 의하여 통일되자, 고구려는 강자인 북위(선비족)에는 약삭빠르게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의 송, 제, 양, 진의 강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비교적 약한 북방민족이나 백제와 신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영토를 넓혀갔다. 고구려 장수왕이 남으로 밀고 내려오니 약삭빠른 백제와 신라는 자위책으로 나제 동맹(서기 433년)을 맺어 방어했으나, 삼국사기를 자세히 분석해보니, 예전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 고구려의 최대 남쪽 국경선은 죽령에서 남양만까지라고 분명히 되어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를 자세히 읽어보지 않고 추측으로 적은 것에 불과하다. 고구려 23대 안원왕 대의 고구려 남쪽 국경선은 강원도 삼척(실직주)에서 충남 청양(우산성) 선까지이니, 고구려의 서남쪽 국경선은 남양만이 아니라 삼국사기 “안원왕 10년(서기 540년) 9월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자 왕은 정예기병 5천을 보내 물리쳤다.”(安原王十年九月百濟圍牛山城王遣精騎五千擊走之)라고 되어있다. 우산성은 지금의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에 있으니 당시 백제의 북쪽국경선은 겨우 금강을 끌어안고 신라와 동맹하여 공주를 겨우 지킨 것이 분명하다. 이병도의 한국사에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더라면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는데, 나제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니 기후가 좋고 평야가 넓고 기름진 나제지역을 모두 평정하기에는 북방민족과 대결하는 고구려가 힘의 한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고구려왕들은 사통팔달(四通八達) 적국으로 둘러싸인 악조건 속에서 후궁도 없이 산 경우가 많아 자식이 없어 형제 상속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26대 영양왕도 자손이 없어 이복형제인 영류왕에게 왕위를 맡겼다. 3천 궁녀와 호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초 요순 말 걸주(初堯舜末桀紂) 의자왕과 대조가 된다. 유비무환을 모르고 태평성대를 즐기다가 피로 물든 산하를 내팽개치고 아차 하면 압록강을 건너려고 의주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현대판 세월호 선원인 선조 임금을 생각합시다. 고구려왕들의 유비무환의 자세가 얼마나 훌륭한가!
김부식은 1145년 삼국사기를 기록할 때에 고기(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본국고기(本國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등의 한국 고유의 기록을 제1차 사료로 삼았으나 이 소중한 고기(古記)들이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어 비록 지금은 전하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나, 이 고기들이 모두 삼국사기 등에 녹아있으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중국 사료(隋書, 舊唐書, 新唐書 등)와 한국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한국 사료를 우선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중국은 기원전 91년에 사마천이 완성했다는 사기가 있고, 일본은 섬나라라 난리가 적어 작자 미상이라고도 하고 망한 백제 도래인 오오노 야스마루가 서기 720년에 완성했다는 일본서기가 전한다. 그러나 우리도 진위(眞僞)논란은 있으나 704년 지은 화랑세기 필사본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그리고 이 책을 씀에는 고려 시대 1145년 당시 김부식이 살던 당시의 글 틀로 되어있어,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이하여 교정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특히 삼국시대의 옛 지명을 현재 지명으로 바꾸어 해석하고 삼국사기의 원문의 한자가 잘못 해석한 것을 고쳐 썼음을 알립니다.
특히 삼국 중 한나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 다른 2국의 표적(標的)이 되었다. 민족이 분열되면 김구 선생의 예언대로 반드시 민족 간에 필연적으로 갈등과 전쟁이 수반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삼국사기에서 달(月) 앞에 계절을 표시한 것은 음력에는 윤달이 있어 계절과 달(月)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본 저자는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을 읽고서 ‘중국 한나라에 한신 장군이 있었다면 신라에는 김유신 장군이 있었기에 민족을 통일했다’라고 크게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