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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도전과 응전 하권 (명성황후 편)

책을 읽으면 수많은 간접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 꿈을 품게 해주고, 그 해결책을 주고, 또한 책 속에 들어 있는 세상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궁무진하다한다. 베스트셀러 ‘책 읽는 뇌’의 저자 미국의 터프츠대 매리언 울프 교수는, “책을 읽는 사람은 인간의 고등정신기능을 좌우하는 좌 뇌가 발달하고, 책을 읽으면 시각과 청각을 통해 수집되는 감각정보와 언어정보를 통합하는 기능이 발달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읽은 내용을 분석하는 능력이 발달한다고 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사회에 나가서 성공할 능력이 높아지며, 독해력 기억력, 사고력, 창의력이 발달하며, 이는 직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남의 위에 올라선다. 그녀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사람은 독서보다 디지털 기기에 매달리는 것 같다고..
책을 읽으면 수많은 간접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 꿈을 품게 해주고, 그 해결책을 주고, 또한 책 속에 들어 있는 세상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궁무진하다한다. 베스트셀러 ‘책 읽는 뇌’의 저자 미국의 터프츠대 매리언 울프 교수는, “책을 읽는 사람은 인간의 고등정신기능을 좌우하는 좌 뇌가 발달하고, 책을 읽으면 시각과 청각을 통해 수집되는 감각정보와 언어정보를 통합하는 기능이 발달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읽은 내용을 분석하는 능력이 발달한다고 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사회에 나가서 성공할 능력이 높아지며, 독해력 기억력, 사고력, 창의력이 발달하며, 이는 직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남의 위에 올라선다. 그녀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사람은 독서보다 디지털 기기에 매달리는 것 같다고 했으며, 한마디로 책을 읽으면 GDP 상승의 보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책 읽는 뇌’의 저자 매리언 울프는 “책을 안 읽으면 국민도 나라도 퇴보한다.”고 했다.
또한 조선일보 2016년 3월 7일자에 쓰기를, “중학교 때 책 많이 읽은 학생은 과목당 수능 점수 18∼22점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고, 책을 많이 읽은 학생은 괜찮은 일자리(대기업, 공기업, 외국계 기업) 얻은 비율이 20% 높았다.”고 나왔다.
윗글과 같이 책을 많이 읽으면 위와 같이 삶에 도움이 될까하여, 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말이 생각도 났고. 더 나아가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은 국력이라 생각되어, 구한말의 파란만장했던 풍전등화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눈물을 자근자근 씹어 먹으면서, 피 말리는 왕족에 대한 외척의 공포정치로부터 안전이 노출되어, 외척정치의 피해자요 당사자인 왕족으로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상갓집 개로 둔갑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황이 절박했던 풍운아로 고달픈 삶의 무게를 힘겹게 지고 타들어 가는 가슴을 조마조마 부둥켜안고 산 사람의 이야기와 그의 英敏한 며느리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두 얼굴을 가진 수수께끼의 인물이 세상을 감쪽같이 속인 흥선 대원군, 사실 그가 학대와 구박을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어도, 안동 김문들에게 코웃음을 치면서 그들을 요리조리 감추기 장난 하 듯 피하며 놀려 먹은 고수의 교묘한 計巧와 欺瞞術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는 정권이 하늘에서 운현궁 안마당으로 저절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의 피눈물을 먹는 위장술로 萬古風霜 다 겪으면서, 안동 김씨들의 멸시와 천대에 감정을 절제하면서, 가까스로 밀계하여 조대비의 치맛자락에서 어렵게 얻어낸 임금 자리인 데, 외척에게 환멸을 느낀 대원군은 며느리만큼은 고아를 얻어 오자고 작심을 하고, 며느리를 얻는다는 것이 대원군이 말했듯이 “며느리의 눈을 아무리 뚫어지게 살펴도 그 마음 속을 알 수 없으니,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관찰에 실패했기 때문에, 굴러온 돌에게 박힌 돌이 빠질 만큼 그의 파격적인 최대 정적으로 돌변한 부메랑이 되어, 기민한 두뇌 회전으로 대궐문을 걸어 잠그고 교활한 늙은이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대원군을 아예 대궐 안에 발을 들여 놓지도 못하게 한 명성황후에 대하여 필을 잡았습니다. 대궐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장안에 발을 못 들여 놓게 양주 곧은 골 산장으로 쫓아버렸다.
사실 남자는 죽을 고비를 넘겨봐야 인생의 참뜻을 알고 여자는 소박을 맞아봐야 인생의 참뜻을 안다고 하는데,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결은 인생의 참맛을 아는 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대결이었다. 사실 사람은 일심동체인 배우자의 편을 들지 부모 편을 들지 않는다. 그러니 품안에 자식이라고 한다. 안동 김씨를 마술사처럼 속인 대원군도 이것을 모르고 며느리와 계속 싸워댔으니,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평범한 진리도 몰랐다.
옛날 일본의 식민 재배를 받은 어른들이 김문들의 60여 년의 오직 백성들의 피만 짜 먹은 세도정치는 나무라지 않고 완전히 기울어져 못쓰게 붕괴된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운 흥선대원군에게 흔히 비평하기를,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써서 서양의 과학기술 까지 쇄국정책의 이론적 배경이었던 위정척사사상에 눌려 근대화가 늦어졌고, 세계사에 대처할 준비가 되지 않아 일본에게 나라가 먹혔다느니,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정권을 가지고 다투는 과정에서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고 하니, 피눈물을 밥알 대신 씹어가며 산 흥선 대원군에게 나라가 망한 덤터기를 모두 씌워서 그 넋두리로 나라 빼앗긴 한을 풀며, 그로 인해 이를 어떻게 갈았는지 이가 모두 없어진 노인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대원군은 조선의 국책인 쇄국정책을 이었을 뿐이었다.
흥선 대원군은 세상이 전하는 바와 같이 별로 속도 없는 한 치인·광인에 불과한 사람으로 보았으나, 알고 보니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무서운 인물이었다고 신정왕후가 평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사실 그렇다. 정적을 그렇게 무섭고 모질고 잔인하게 다루는 안동 김문들이 흥선군의 속셈을 전혀 모르고 신경을 쓰지 않게 만들어 놓았으니 약은 놈이 음흉한 놈 못 이긴다.
흥선군은 김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원수의 원수는 동지라고 같은 처지에 있는 조대비와 조성하를 통하여 연결하였다. 조대비 역시 김씨 일문에 원한이 사무쳐 그들의 수모에 치가 떨린다고 하면서 김씨라고 않고 김가 또는 흉적이라고 하니, 흥선군도 따라서 김가 또는 흉적이라고 부르니, 둘은 환상적인 짝패가 되었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는데 흥선군은 호랑이가 풀을 뜯으며, 안동 김씨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참고 낙척(落拓)과 와신상담(臥薪嘗膽) 10년 끝에 그 누구의 말대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안동 김씨라는 빨대 족을 물리쳐 한 시대를 가게 한 운현궁의 호랑이 아니 큰 별이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내려갈 때도 있다는데, 며느리를 택한다는 것이 너무 영민하여 그녀에 의하여 쫓겨나 불도저 같은 한 시대를 가게 한 유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우리가 쇄국정책 운운하며 흥선 대원군을 탓하기 전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60년간의 긴 세월 동안 안동 김씨라고도 하고 장동 김씨라고도 하는 외척의 악취가 풍기는 구정물통 정치를 봐야한다. 안동 김씨들은 16세기에 안동에서 서울의 장의동(종로구 신영동에 있던 마을로서, 이곳이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창의문이 있어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장의동이라 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끝까지 가면 터진다는데 권력을 잡은 당사자들은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부패를 모른다고 한다. 안동 김씨라는 구정물통 정치 하에서는 뒷돈주고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공공연히 사고파는 세상이니, 나라꼴은 그들의 등살에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러댔다. 그러나 종기가 곪으면 터진다는 간단한 원리를 권력을 잡은 당사자들은 모른다고 한다.
안동 김씨들은 세도를 이어가기 위해 음서(蔭敍) 출신은 무시하니, 학문이 없는 자일지라도 부정으로 병과에 느슨하게 합격시켜 안동 김문이며, 반상이 골수에 박힌 조선조에 능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까지 돈만 주면 끌어들여 세를 불려갔다, 그리고 왕의 재목도 안 되는 사람을 억지로 왕좌에 앉혔다. 왜냐하면 무식한 왕은 안동 김씨가 주무르기 좋으니, 강화도에서 데려온 철종처럼 目不識丁에 너무 어지시어 어릿어릿 하며 정치에 문외한인 왕을 선호하니 나라꼴은 엉망으로 돌아가 정치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자체가 문제가 되어 백성을 착취하는 도구로 돌변하여, 민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조정이 皮相的으로 환부를 도려내면 다시 雨後竹筍처럼 일어나는 민란만능주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안동 김씨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조금이라도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했고, 견제는 역모라는 무서운 누명으로 이어졌다. 조금만 왕의 자질이 엿 보이는 왕족은 꾸미지도 않은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멀리 귀양 가서 살해당했다. 왕족 이하전은 눈치 없이 젊은 혈기에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요, 김씨의 나라요’라고 악담 넋두리하며 막말을 늘어놓았다가 역모를 뒤집어쓰고 목을 빼앗겨야했다. 그리고 철종이 사자 없이 훙거할 경우 사자(嗣者) 1위인 경평군 이호도 김좌근과 김문근을 비난하다가 남해안 신지도에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구곡간장(九曲肝腸) 을올이 빠지는 고통을 겪었다. 눈치 빠른 흥선군에게는 ‘간디가 인도 땅 전체가 감옥인 데 감옥 가는 것 두렵지 않다’고 했는데 그에게는 조선 땅 전체가 다 종친 숨통 조이는 감옥이었다. 그래서 감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들의 눈을 속여 밑으로 호박씨 까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영부영 기신기신 대가 집 잔치에나 찾아다니며 기식(寄食)하며 치인(癡人) 행세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거듭 쓰지만 약은 사람이 음흉한 사람 못 이긴다고 밑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무척 음흉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혈통적으로는 왕의 자리와 멀지만 헌종의 훙거로 정조의 혈통이 끊어지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혈통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안동 김씨들이 왕손들의 숨통을 조여 오는 상황에서, 흥선군은 왕의 혈통과 멀지만 양자로 편입된 가계 상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이, 왕손답게 목에다 깁스를 하고 다녔거나, 또는 구름이나 희롱하고 학이나 벗 삼았던들 진즉에 목을 빼앗겼을 텐 데, 투전판에 기생오입질로 파락호 짓을 천직으로 삼아, 조선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올 때 까지 본래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천덕꾸러기 궁걸인(宮乞人)으로 위장하여 수모를 견모불욕(見侮不辱)을 생각하며 곱씹어 꿀꺽 삼켰으니 목숨을 부지했다. 이렇게 기민한 두뇌회전을 한 흥선군이 시중잡배와 개망나니 짓을 하면서도, 피 말리는 접전으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의 철옹성(鐵甕城)을 공파(攻破)하는 정치 혁명을 일으키고, 서원을 철폐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약자 편에 서서 정치 돌풍을 일으켜 백성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정치가였다.
개망나니 짓을 하면서도 눈과 귀는 대궐을 향한 복병 작전이야말로 高手의 전략과 전술이었으니, 약은 다수의 김문이 음흉한 흥선군 한 사람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말았으니, 즉 엉뚱한 생활로 김문들의 눈을 속이면서 실속은 다 차리었던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치인이나 광인 행세만 잘한 것이 아니라 농담도 곧 잘했다고 한다. 내시들에게 바짓가랑이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걷기에 편하겠다고 내시들을 우롱한 것도 흥선대원군의 말이고, 팔도 사람의 성격을 평한 것도 대원군이란 말도 있다.
사실 세도정치(勢道政治)는 당파정치보다 훨씬 부패타락한 반대파가 없는 지독한 일문독재정치로 그들 문중회의의 의향이 곧 법이 되는 세상으로 똑똑한 종친들의 목을 자르고, 흥선군을 궁걸인으로 몰고 왔으며 군왕도 목우인(木偶人)이나 장식물 같은 존재로 만들어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마저도 심지어 글 모르는 사람에게 까지 뒷돈 거래가 횡행하고, 오히려 서구 문물을 들여와 나라를 개화 시키려는 양심적인 실학자들은 귀양살이나 시키고, 매관매직과 가렴주구가 판을 치니 벗겨지는 백성들은 민란밖에 선택할 수 없는 나라의 장래가 꽉 막힌 정치행태로 국운마저 기울게 할 정도로 부패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보다 못한 순조는 그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풍양(현 남양주시 별내면과 진건면)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으니, 그녀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흥선군의 환상적인 복합조 조대비(신정왕후)로 그녀는 풍양 조씨의 제물이 되어 54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외로운 등잔을 지키며, 숨통 조이는 안동 김문 등살 아래서도 대궐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강인한 여인이었다. 목우인 순조는 안동김씨의 자태를 보다 못하여 풍양 조씨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효명세자로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만들어냈다.
이 무시무시한 세도정치 하에서 ‘가뭄이 들어 논바닥이 쩍쩍 갈라진 것을 보고 타들어가는 백성들의 마음 같다’고 한 백성들을 무척 긍휼이 여기는 태종 이방원 같은 냉혹한 사람이 왕을 했다면 정치 상황이 어떻게 돌변했을까? 냉혹한 태종 이방원은 척신들이 정치에 얼씬도 못하도록 세종의 외숙 4명과 그의 장인 심온을 생트집 잡아 목을 싹둑 자르고 저 세상으로 갈 때 그는 지은 죄 때문에 가슴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대의 즉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할 수 없었다. 세종의 빛나는 위업과 태평성대는 태종 이방원이 만들어주고 간 것이라는 것을 당시 백성들은 가슴에 깊이깊이 새기고 또 새기었다.
원래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못하면 사악하고 간교한 신하들만 들끓는다고 했다. 간신배와 시정잡배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 무식해서 용감한 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나라는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쯤은 초등학교 역사책 몇 장 넘겨도 다 나오는 내용이다.
  세도정하에서 흥선군은 안동 김씨에 대하여 악담과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고 막말을 해대고 싶어도 면종복배(面從腹背)로 두 손 비비며 들뜨는 마음을 다잡으며 꾹 참았다. 청춘부터 깨어진 달빛 품고 구곡간장(九曲肝腸) 낱낱이 갈라지는 시름으로 탄식을 하며, ‘외로운 등잔’ 공규(空閨)를 지켜오며 성리학의 규범에 묶인 열녀로 인종(忍從)이라는 덕을 두터이 해온 텃세로 누구든 용훼(容喙)를 허락하지 않는 최고 권위자 조대비(신정왕후)가 말하기를, “우리 풍양 조씨 문중에는 흥선군만한 인물이 없어, 그 피가 거꾸로 흐르는 안동 김씨들에게 받은 수모(受侮)와 모멸감(侮蔑感)으로 수십 마리의 독사와 비수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감정과 표정을 죽여 버리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탕행(宕行)과 기행(奇行)으로 위장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信念을 갖고 꿀꺽 삼키며 감내(堪耐)한 것을 보면 대단한 高手지.”하면서 풍양 조씨들에게 자물쇠 입 흥선군을 본 받아 입조심 하라고 타이른 것을 보면 흥선대원군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안동 김문 중에도 김문근의 형인 김수근의 아들 김병학과 김병국 형제는 흥선군의 오위도총관 시절 그 분명하고 강직한 호령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가면을 쓰고 무서운 꿈을 도모하고 있다가 그 가면을 벗고 나오는 날, 가로 뻗은 쓸 데 없는 가지는 잘라 버릴 테고 맑지 못한 우물은 메워버릴 테고, 인재면 반상을 가리지 않고 쓰고, 무능하면 아무리 좋은 문벌 집안이라도 버리고, 그 꼼꼼하고 왈왈한 성미 때문에 운현궁 호랑이의 무서운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짐작하고 동정심을 초월하여 안동 김문을 향한 그의 패력(覇力)을 누그러트리기 위하여 자위권에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이들 양심 있는 형제는 이세상은 과거 제도가 엉망으로 벼슬을 팔아먹고, 수만 냥 빚 얻어 수령·방백 나가봐야 선정을 베풀면 천문학적 빚더미 위에 올라앉는 나라, 왕의 무능으로 인한 세도정치의 결함 때문에 청백리가 수령과 방백을 나가도 탐관오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나라, 임금이 힘이 없으니 억울한 일 상소해봐야 소용없는 나라, 사무가 혼돈하고 회계에 문서가 없는 나라, 수령방백이 왜 자주 바뀌는지 임금이 모르는 나라를 당태종 이세민이나 태종 이방원 같은 사람이 나와 나라가 망하기 전에 바로잡아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사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 고 했는데, 의미 있고 주목 받아야 할 특별한 삶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의 대다수의 삶이 사소한 일상으로 채워지듯이, 눈물 젖은 밥술을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도 그 왜소한 체구하나 못 채워 영양 불량으로 장작개비 같이 피골이 상접하여, 걸식하여 사는 것이 사소한 일상이 되어 버린 흥선대원군은 인생의 참맛을 아는 노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정권을 틀어쥐었을 때 그에게 수모를 안겨준 안동 김씨들이 모두 목이 달아나는 줄 알았다. 사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조대비는 정권을 잡고 흥선군에에 대권을 주고 나서 안동 흉적 처벌을 이렇게 말했다. 김수근은 부관참시, 그의 아들 병학과 병국은 절도 원배, 하옥 김좌근은 자기 남편 익종의 외숙이니 삭관이나 하고, 김병기는 원배 후 사사를 흥선군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권불십년인데 대왕대비께서 가신 후에 조성하와 조영하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오리까? 안동 김문들은 봄날의 눈이라 그냥 놔두어도 없어집니다. 관대한 처벌은 후일 덕행의 표본으로 남으니 그냥 두자고 하여 흥선군의 논리 정연한 말에 조대비는 설득되고 말았으니, 흥선군은 “적국을 점령하고 민심을 점령하는 것이 살육보다 중요하다.”란 손자병법을 잘 알고 있었으니, 손자병법은 군사 책략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큰 지침서였다. 사실 한국전쟁 때 유엔군은 민폐가 있었지만 중공군은 민폐가 없었다는 말은 중국인들이 손자병법을 실천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흥선군은 속죄금 구십만 냥을 김씨 일문으로 부터 뜯어다가 조대비 앞 지락에 내놓으니 조대비는 벙긋이 웃었다. 구십만 냥 중 벼슬 장사꾼 나주 합하 양씨로부터 뜯어낸 금액은 이십만 냥이나 되었다. 흥선군은 파락호 투전꾼이라 이런 일 알선책에도 능수능란하였다.
韓信이 냄새 풍기는 샅을 기어들어가게 하여 한 장군을 망지소조(罔知所措)하게 한 부랑자들에게 후에 벼슬을 주듯이 그는 역시 고수였다. “피는 다른 피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복수에는 두 개의 무덤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알았다. 하나는 적의 무덤이요 또 하나는 자신의 무덤이다.” 흥선군은 정적을 죽이는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광풍 부는 조선말에 풍운아로 태어나서도 7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조대비는 흥선군을 처음 만나보고 한마디로 이렇게 생각했다. “안동 김문의 눈을 감쪽같이 속인 것을 보면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무서운 인물이다.”라고 생각했으나 아직 신중한 조대비의 생각에는 더 검증해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 그녀의 단수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60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종식시켜 삼정의 문란과 민란을 많이 잠재웠다. 그러나 흥선군 입장에서는 안동 김씨만을 미워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조대비가 사랑하고 아끼던 흥선군의 최대 정적 이하전을 제거해준 것이 누구이던가? 그것이 안동 김씨였다. 안동 김씨 덕분에 고종이 등극할 수 있었다는 점을 흥선군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짐승 취급한 안동 김문에게 피의 맛만은 보여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경복궁 짓는데 거금을 희사한 세도정치의 원흉 김병기도 다시 등용하지 않았던가? 흥선군은 작은 체구답지 않게 度量이 무척 너그럽고 깊으면서도 매서웠다. 더불어 유비·김종서·나폴레옹·박정희·김영삼도 작은 체구답지 않게 대범하고 도량이 넓고 매서웠다.
‘운현궁의 봄’에서 흥선군은 김병기를 표현할 때,“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김병기에게 수모를 당했다.” 했는데 김병기는 1818년생이고 흥선군은 1820년생이다. 그리고 “김병기는 안동 김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란 표현을 하고 김병기가 깁병학에게 형님이라고 하는 데 김병기가 병학보다 세 살 위의 형으로 김병기는 ‘병’자 항렬 중 좌장 격으로 영특했으나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한숨을 삼키며 사는 흥선군의 마음을 읽지 못한 흠결이 있었다.
거듭 기술하지만 대원군은 고종의 임금 자리가 하늘에서 운현궁 돌담 안으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1771년에 죽은 은신군에게 1788년에 태어난 남연군이 얼굴도 모르는 은신군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에 가능했고, 흥선군이 개망나니 짓을 하면서 만고풍상 다 겪으면서 살아나서 조성하를 살살 꾀어내어 조대비와 대면했기 때문에 얻은 자리인데, 영특하고 재빠른 며느리를 얻어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일생을 통해 맹렬히 투쟁·대결하는 원수 사이가 됐다.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척을 지기 시작한 것은, 영보당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을 때 대원군이 고종을 향하여, ‘야 경사로군 경사, 이제 안심해도 되겠군!’이라고 하면서 유쾌하게 큰소리를 지르며, 아비보다 나를 더 닮았다고 입이 쫙 찢어지게 웃을 때에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면서, 소리 안 나는 총이라도 있었으면 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중궁에게서 나온 적장자도 아닌데 대원군은 아무나 서출이라도 꿰어 맞추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좋아했다. 사실 광해군이 서출 세자가 되고 나서 광해군보다 아홉 살 밑의 인목대비에게서 31세 연하의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부터 광해군의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이기 시작한 것을 명성황후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헌종이 사자 없이 훙서하고,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주위 사람들이 허점을 찌르고 엉뚱한 사람이 사자로 쑤시고 들어왔기 때문에 대원군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그랬다.
사실 명성황후는 원래 그 氣像이 사내를 능가하는 민 자영이었다. 마을에서 놀 때에도 오히려 사내아이들을 지배하고 지휘하고, 원대한 꿈을 품고 책을 읽으며 寸陰을 버리지 않고 살았으니, 이 감고당의 이름 없는 소녀가 나라의 역사를 장식할 동량(棟梁)으로 자랐다.
원래 천성이 영특하고 재빠른 머리에 독서를 광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 무서운 대원군을 젖히고, 측천무후가 당 고종을 젖히고 실권자가 된 것처럼 고종을 젖히고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이렇게 당 고종과 조선의 고종은 마누라도 능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동병상련 간이었으나, 고려 고종은 그 무적 몽고에 28년 동안 굴복하지 않을 정도로 굳세었는데 같은 묘호(廟號)를 받은 것이 이상하다. 난세의 군주는 냉혹해야하는데 조선의 고종은 너무나 따스한 흠결이 있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오랜 반목과 대결의 결과는 백성들 사이에서 우둔한 고종의 꾀주머니로 알려져 있는 명성황후의 손으로 나라가 넘어가자, 빈민 출신이라 부유한 양반들을 압박하여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조세는 많이 거두었으나 질서가 잡혔던 대원군 시대를 오히려 갈구했다. 호랑이 같은 대원군이 1873년에 섭정이 끝나고 멍청한 데에는 약도 없다는데 장승과 흡사하게 닮은 고종 대신 여우같은 명성황후가 정권을 잇자, 역사는 history(남자의 이야기)에서 herstory(여자의 이야기)로 변한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심하다고는 했으나,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는 그들의 세도정치와 성격이나 모델이 아주 딴판으로 달랐다. 왜냐하면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그래도 친딸이나 친자매가 왕비이니 그래도 딸네 집 또는 누나네 집 살림살이니, 백성들을 잡아먹어도 주인의식을 갖고 눈치 것 먹으면서 민씨세도보다는 비교적 일에 성의를 보였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목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는 명성황후의 12촌 밖에 사람들이 명성황후 살림을 돌봐주니 12촌이 무슨 일가친척인가? 벼슬만 붙들면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 몫을 챙기기에 바빴다. 왜냐하면 먼 친척이 왕비이니 그 벼슬이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따위 짓 즉 백성들을 잡아먹는 못된 세도정치를 함부로 해댔다. 그러니 명성황후의 먼 친척인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가 백성들이나 반대파에 의하여 연달아 목을 빼앗겼고, 명성황후 자신도 고자 순종의 건강을 비는 굿판이나 벌리면서 재정을 모두 날리니, 대원군 때 그 거대한 경복궁을 짓고도 그 탁탁하던 재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온 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세 번이나 양이를 물리치는데 성공했는데, 민씨 정권하에서는 나라의 근본인 재정이 토붕와해(土崩瓦解)되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조차도 봉급을 못주니, 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으니, 조선은 亡兆가 들기 시작했다.
조선의 망조는 명성황후가 국가재정을 모두 말아먹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봉급조차도 못 주어 나라를 지킬 수 없으니, 외세를 이용하여 외세를 막으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미봉책으로 잔머리나 굴리고, 백성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사심없이 통 큰 머리를 굴린 대원군을 쫓아낸 명성황후가 책임져야 한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원군을 좋아하는 학생과 싫어하는 학생으로 나뉘는 것은 대원군의 득책과 실책으로 나누어 가르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득책으로 서원철폐나 양반의 호포법 실시를 들고, 실책으로 경복궁 중건과 쇄국정책을 든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득책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으니, 민족의 혼이 살아있고, 오늘날 경복궁이 한국제일의 관광명소가 되어 한국의 문화도 자랑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후세에 오늘날 경주나 부여처럼 왕궁 터가 어디인지도 모를 번 하였다. 단 고구려의 왕궁 터와 외성의 일부는 지금 만주 지난에 남아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쇄국정책은 조선대대로 내려오는 국책이었지 대원군이 새로 쓴 정책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우선 시급한 부국강병을 이루어 놓아서, 나라가 외세에 짓밟히지 않겠다고 생각 될 때 개국을 한다고 했다. 명성황후처럼 개국해 놓고, 우선 시급한 서양의 무기나 기술은 도입 않고, 축음기 시계 등 사치품이나 들여온 개국으로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민씨 정권하에서는 글 모르는 사람이 수령을 했다고 적혀 있다. 오죽했으면 그의 눈에 비친 민씨 정권은 ‘미치광이로 들끓는 도깨비 나라’라고 표현했다. 사실 근대화로 넘어가야 할 길목에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에 이어 다시 민씨의 미치광이 세도정치가 걸림돌이 되어 나라가 서서히 일제로 넘어가는 것을 본, 황현의 표현은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절박한 상황인데도 특권층의 사리사욕에, 얼마나 화가 복받쳤으면 미치광이 운운하는 표현을 썼을까도 생각해봐야한다. 사실 꾀 많은 사람이 天機를 모르면 자기 꾀에 넘어가서 평생을 망치고 만다.
사실 불변즉망(不變卽亡)이란 말이 있는데 조선은 변하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신혼 초 고종에게 소박맞고 남편 대신 책으로 대리만족했다고 하는데, 명성황후의 그 많은 독서는 한계가 있었다. 중국의 고전 가지고는 개혁을 해도 皮相的인 개혁일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실세인 명성황후는 실학서와 더불어 서양의 계몽사상과 근대 과학기술 서를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꾸준히 탐독하여 정책에 반영해 근대화를 앞당겼다면 격세지감(隔世之感)과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명성황후유신이 될 뻔하였다.
명성황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부인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마음씨가 친절하고 손이 큰 여자로, 지적수준이 높은 여자며, 아주 비범한 외교 수완이 있는 여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왕비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심하게 교활하고 권력에 눈이 멀어 며느리도 죽이고 아들도 죽이려고 하는 아주 교활한 늙은이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것은 명성황후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적은 것 같다.
사학자 이원순 교수는, “중고등학생들이 대원군만큼은 좋아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 둘로 갈린다.”라고 말했다. 거듭 기술하지만, 싫어하는 자들은 쇄국정책 때문이다. 그러나 쇄국정책은 네덜란드인 박연이 고국 땅을 못 밟아보고 조선 땅에서 죽고,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도망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쓴 것이 아니다. 대원군은 그저 예전 국법대로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고, 개국을 할 만큼 국력을 신장 시킨 다음 개국정책을 쓰려고 했을 뿐이었다. 사실 명성황후가 일본을 피해보려다가 원수 일본인의 손에 의하여 시해되었으니, 많은 동정을 얻어 역사의 비평을 다수 따돌렸지 그렇지 못했으면 ‘나주 합하 양씨나 서태후 줄’에 설 번하였다.
두 주인공을 비교해보자, 명성황후는 英敏했었다. 영특하고 민첩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陰凶하고 愼重했다. 영특한 사람이 음흉한 사람한테 진다. 민첩한 사람이 신중한 사람에게 진다. 명성황후는 남편이 임금이니 아들이 임금인 대원군보다 명분이 앞섰다. 그리고 고종은 끝까지 아버지보다 아내를 택했다. 고종뿐만 아니라 누구나 부모보다 배우자를 선택한다. 명성황후는 명분이 유리했기 때문에 나섰으나 미련하게도 외척에게 지친 백성들에게 외척을 업고 나섰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으나, 대원군은 외척 타도를 내걸고 나섰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대원군은 부국강병과 양반타도를 내걸고 나섰으나 명성황후는 민씨정권의 유지에나 급급했고 부국강병이나 백성들의 안위는 뒷전이었다. 대원군은 정권이 썩지 않았고 재정을 축적하는 정책으로 부국강병을 꾀했으나 명성황후는 안동 김씨의 재판으로 부패했고, 정권유지와 민씨들의 사복만 채웠다.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망한다. 당시 민씨 정권이 얼마나 부패했나는 망국으로 자결한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끝으로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 두 전쟁을 논하겠다. 임진왜란 당시 명일전쟁은 명나라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예상을 뒤엎고 청일전쟁은 상대가 안 되게 청나라가 일본에게 무너졌다. 그 이유는 조선이 수수방관(袖手傍觀)했기 때문이고, 청나라는 이민족의 나라였기 때문에 다수의 한족들이 힘을 기울이지 않은 면이 컸고, 서태후가 명성황후와 같이 失政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에 러시아가 일본에게 예상을 뒤엎고 무너진 것은 삼국간섭에 의하여 일본이 너무나 러시아에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정도로 한을 품었던 탓이다.
끝으로 1914년에 태어난 일본인 여류 작가 쓰노다 후사코가 쓴 명성황후의 유해확인 과정을 일본 사람이면서도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쓴 글을 보면, “그녀의 얼굴은 젊었으나 다시 젖가슴을 살펴보니 나이 든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았던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는 이국의 사내들에게 이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더욱이 명성황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들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당시 조선정부의 참사관이 일본 법제국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롭다고 서두에 쓰고,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고 적고 있다. 감히 조선의 국모 屍身을 이렇게 일본 浪人들이 함부로 대했으니 민족의 분노를 일으킨다. 명성황후 전을 읽어보고 작가가 꾸민 픽션이려니, 했으나 일본인이 또 같은 여자가 쓴 글을 읽고서야 진실임을 알았다.
이 글을 쓰면서 三十六計 줄행랑의 대명사 선조는 참으로 복 받은 임금이라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을 극복해냈으니 말이다. 선조의 곁에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훌륭한 충신들이 많았는데 고종의 옆에는 한 사람도 없다. 선조의 옆에는 이순신, 권율, 곽재우, 유성룡, 정탁, 이덕형, 이항복 같은 나라를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기라성 같은 충신들이 많았다. 그런데 고종 옆에는 눈을 씻고 봐도 충신이 없다. 오히려 나라 팔아먹은 을사5적신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라! 백성들도 수수방관한다. 대원군의 말대로 오랜 세도정치에 지친 백성들이 될 대로 되라고 마음이 나라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대원군에 의한 종결과 민씨의 세도정치의 재판에 명성황후 시해를 다루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서민들의 애환을 잘 알아 세도정치 종결과 동시에 서민의 편에 선 대원군의 정치와 다시 미치광이로 들끓는 도깨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을 다뤘습니다.
역사에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대원군이 끝까지 대권을 잡고 있었으면, 민씨정권 같은 부정부패에 따른 재정파탄은 없었고, 일본의 도전에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차도살인(借刀殺人) 같은 얌체계략은 쓰지 않았고, 일본의 挑戰에 나라를 그냥 내주지 않고 임진왜란 때처럼 크게 응전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유성룡 전기를 쓰면서 선조 임금은 삼십육계 줄행랑의 선수권 보유자라 기술했으나, 고종과 명성황후에 비하면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훌륭한 임금이라 생각 되며, 구한말에도 임진왜란 때처럼 장량 같은 명재상 유성룡과 한신을 흡사하게 닮은 명장 이순신 같은 인물이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지난 일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기 쉬워서 이 책을 적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지나가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그런 일이 반복해서 미래에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요저서;
읽을거리만 뽑은 연산군일기
조공녀 기황후
백성을 하늘로 본 정도전
난세를 슬기롭게 극복한 류성룡
태종 이방원
폭군이야기 상권
폭군이야기 하권
대원군과 명성황의 도전과 응전
청백리 황희와 맹사성
화랑세기 속의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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